명성황후 or 민비
19세기 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성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혹적이고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녀는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손에 비극적 죽음을 맞은 조선의 마지막 국모
드라마나 뮤지컬에서 나오는 그녀의 마지막 외침 "내가 조선의 국모다"가 떠오르게 한다.
명성황후는 각종 매체에서 조선의 아픔이였고 일본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혹자들은 명성황후를 민비 민씨라 칭하며 그녀를 욕한다.
왜일까?
*독일의 사진작가가 찍은 살해당한 왕비로 주석이 붙어있으며
실제 민비를 본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사진*
민비는 질투가 강하고 권력욕이 심하였으며
미신을 좋아해 엄청난 국고를 탕진하였다.
일례로 그의 아들 순종의 건강을 비는 제사에 금강산 봉우리 마다 쌀 한섬,비단 한필,돈 천냥씩 바쳤다는데
금강산 봉우리는 일만이천봉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氏 즉 사돈의 팔촌들에게까지 자리를 나눠 주고 큰돈에 팔아
그 당시 관료들의 상당수가 민씨였으며 민씨라면 개라도 등용을 했다고 한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자들은 당연히 다시 돈을 회수하느라 눈에 불을 켜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었다.
1882년엔 국고부족 등으로 인한 임금 미지급에 대한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씨 일가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여 권력의 자리로 다시 복귀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은 청나라는 물론 일본의 영향까지 더욱 크게 받게 되고
각종 이권들을 넘겨주게된다.
나중엔 러시아 까지 끌어들이자 조선 지배에 대한 위기를 느낀 일본이 낭인들을 보내
처참하게 죽게 된다.
사실 민비가 죽고나서 그에 분노한 백성들이 을미의병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백성들의 생각은
민비가 죽어서 화났다기 보단 잘~ 죽었는데 일본의 손에 조선의 국모가 죽은것에 대한 분노 였을거라고 한다.
명성황후는 요즘 세대들에겐 드라마와 뮤지컬 속 '국모'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명성황후를 민비라 부르면 명성황후라고 불러주세요 라며 발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민비'는 전혀 비하하는 호칭이 아니며
고종은 '광무황제'라 하지않고 대원군은 '대원위'라 하지 않으면서
민비는 굳이 '명성황후'로 꼭 칭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일본의 손에 죽었기에 망정이지 임오군란때 조선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을 수 도 있는
다시봐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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